[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고구려 남단 ‘어숙(於宿)’ 벽화고분 생생 (3)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고구려 남단 ‘어숙(於宿)’ 벽화고분 생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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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관아터 너머로 보이는 비봉산
관아터 너머로 보이는 비봉산

충의의 고장 순흥

순흥은 충(忠)과 절의(節義)의 고장이다. 조선조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내쫓고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이때 순흥은 단종 복위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순흥은 유혈이 낭자한 곳이 되었다.

단종 복위를 시도한 인물은 세종과 소헌황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 영월은 순흥에서 소백산 마구령과 고치령을 넘으면 쉽게 닿는 곳이다. 마침 금성대군도 단종이 폐위를 당한 후에는 경기도 광주의 유배지에서 순흥으로 옮겨와 위리안치 되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지만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발각이 돼 죽음을 당했다. 당시 순흥에 거주하던 수많은 선비들도 연루되어 참수를 당했다.

영주에 ‘핏끝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당시 형장에서 흘린 피가 죽계천에서 서천으로 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중종시대 주세붕은 1541년 풍기군수로 있을 때 백운동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웠다. 그리고 1543년 주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삼았다.

그 후 퇴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음으로써 사림의 중심처로 자리 잡았다. 주세붕은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도관찰사 때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워 최충(崔冲)을 제향하기도 했다.

대사성·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 중추부동지사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사후에는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봉서루
봉서루

예학의 잔영 순흥부 관아터

<세종실록지리지 권150 지리지 경상도 순흥 도호부조>에는 “충숙왕 계축년(1313)에 또 태를 안치하고 승격시켜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삼았다. 충목왕 무자년(1348)에도 태를 안치하고 순흥부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종 계사년(1413)의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 <고려사 권57 지리지2 안동부 흥주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고적조>에 순흥폐부(順興廢府)가 기록되어 있다.

“본시 고구려 급벌산군이다. 신라 경덕왕이 급산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흥주로 고쳤다.(順興 廢府. 本高句麗 及伐山郡 新羅 景德王 改 岌山郡 高麗初 改興州云云).”

고려 말 문명이 높았던 근재 안축(謹齋 安軸)은 순흥 사람이다. 읍성 안에 있던 봉서루(鳳棲樓) 기문을 남겼는데 영남 누각 건물 중 가장 으뜸으로 쳤다. 봉서루는 오래전에 건물이 없어졌으나 일제 강점기인 1930년 중건 되었다. 일제시기 복건이지만 고증을 잘하여 품위가 있다. 안축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밀직사지사, 첨의찬성사, 정치도감판사 등을 지냈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등을 남긴 문호다.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길은 세 개이니 태백, 소백, 죽령이 그것이다. 영남에 뿌리박은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이다. (중략)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임금이 서울로 가는 길이다. (중략) 영남에 있는 누대 가운데 이와 훌륭함을 겨룰 것이 없다.”

순흥읍성은 고려시대 축성되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현재는 읍내 1리 새마을회관 앞에 ㄱ자 모양으로 40m 가량 성벽이 남아있다. 관아 터에는 역대 부사들의 선정비와 척화비, 관아 주춧돌 등이 가지런히 전시되고 있다, 주춧돌가운데는 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원형주좌(圓形柱座)도 있으며 순흥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비록 읍성은 헐렸으나 곳곳에 산란하는 와편과 초석들은 옛 날 순흥부의 영화를 증명하고 있다. 와편 가운데는 뜻 밖에 적색기와편도 수습된다. 민가들이 흩어진 성 돌을 가져와 담장을 쌓았다. 일제강점기 무참하게 부서진 읍성의 잔해들이 지금도 애잔하기만 하다.비봉산성을 비롯하여 주변의 유적들에 대한 확대 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역사문화연구회와 글마루 취재반은 수많은 고분이 조사 된 순흥면 태장리 일대에서 아직 조사가 안 된 고대 토성지 1기를 찾았다. 고분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유적일 수 있다. 어숙과 고구려인들의 생활사를 입증 할 유적 유물들이 출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옛 순흥읍성 성벽
옛 순흥읍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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