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시대의 풍운아 의친왕의 발자취를 찾아서(3)
[문화칼럼] 시대의 풍운아 의친왕의 발자취를 찾아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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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의 6개국 순방과 관련하여 ‘마지막 황실의 추억’ 제하의 책 194쪽을 인용한다.

“‘고종실록’의 이 기사에 대해서는 나도 의문이 생긴다. 어머니인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5일 만에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라고 고종황제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는 ‘답례 방문’이라고 했는데 무엇에 대한 답례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아버지의 유럽 순방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1896(건양 1)년 의친왕은 일본으로 가게 되며, 그 이듬해인 1897(광무 1)년 1월말에 일본을 떠나 미국의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워싱턴에 머물던 의친왕이 다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이후 당시 조선왕실(朝鮮王室)에 거대한 전환점(轉換點)을 이루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원구단(圓丘壇)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宣布)한 것이었다.

을미시해(乙未弑害) 이후 조선왕실(朝鮮王室)은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엄귀비(嚴貴妃)의 주도(主導)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황제와 황태자(皇太子)가 극비리에 가마를 타고 경복궁(景福宮)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896(건양 1)년에 일어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이러한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하여 조정(朝廷)에 친러내각이 출범하였으며, 러시아 공사관에서 엄귀비가 승은(承恩)을 입어 왕자가 태어나니 그가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는 영친왕(英親王)이었다.

사실 최종적으로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冊封)되었지만 엄밀히 말하여 서열로 볼 때는 그 보다 20년 연상인 의친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당시의 여러 가지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다.

한편 고종황제는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서 자연히 국정의 중심은 친일에서 친러내각으로 변모하게 되며, 결국 조정 중신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1897(광무 1)년 2월 고종황제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궁(還宮)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還宮)이 이루어진 이후 드디어 1897(광무 1)년 10월 12일 현재의 조선호텔이 위치한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대내외적으로 조선이 이제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천자(天子) 즉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이제 506년의 조선왕조의 시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나라인 대한제국 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인조(仁祖)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하여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볼모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고종황제는 조선이 260여년 동안 청나라의 종속국으로 있었던 불행한 역사를 과감히 청산하는 의미에서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하였다.

한편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2년 후인 1899(광무 3)년 의친왕은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는데, 처음에 오하이오주 웨슬레안 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곳에서 당시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란사(金蘭史)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인연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훗날 고종황제가 파리강화회의 특사에 의친왕과 김란사를 선정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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