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속으로] 이건희 회장의 스포츠 극일(克日)
[스포츠 속으로] 이건희 회장의 스포츠 극일(克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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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일본 도쿄 도심 신주쿠에 위치한 와세다대학 본부 캠퍼스 학생식당 옆에 한국식 정자가 있다. 정자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와세다 대학출신 한국 기업인 등이 기금을 모아 기증해서 만들어졌다. 이건희 회장은 와세다대 동문인 선친 이병철 회장의 영향으로 어릴 적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은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가 일본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스포츠도 잘 아는 대표적인 한국 기업 총수의 한 명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 회장이 대학 재학 중일 때만 해도 한국 경제는 기술적 차이가 워낙 커 일본 경제의 변방 역할을 하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선진 기술을 도입할 정도도 되지 않았으며 그냥 흉내 내는 데 불과했다. 이 회장은 선친과 함께 일본 경영기법과 노하우를 부지런히 배우고 삼성에 적용했다.

서울사대부고 시절 클럽활동으로 레슬링을 직접 하기도 한 그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도쿄올림픽을 개최한 일본은 스포츠에서도 선진국이었다. 이 회장은 낙후된 한국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숨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그의 사후 국내 스포츠 관계자들을 통해 밝혀졌다.

이에리사 전 의원은 필자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1970년대 이 회장의 집에서 최신 일제 비디오를 통해 북한 선수 경기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은 “회장님께서 탁구를 사랑하셨다. 선수 시절 북한 선수 경기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 집으로 초대해 주셔서 녹화 필름을 보면서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꼼꼼히 챙겨주셨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자장비와 자동차 수집이 취미이기도 했던 이 회장이 당시 일본의 신기술을 활용해 한국 스포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앞장섰다는 얘기였다.

1987년 이병철 회장 타계 후 삼성그룹 경영을 책임지게 된 그는 일본에서 배운 경영과 기술을 토대로 반도체, TV 등에서 신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삼성전자 등이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일본 기업들을 하나씩 제쳐 나가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자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기업인 NEC는 국제순회방식의 배구대회인 월드리그 스폰서로 한국 경기에 까다로운 조건을 걸며 압박을 가한 적도 있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IOC총회에서 이 회장이 개인자격으로 IOC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일본스포츠가 한국을 바라보는 자세는 완연히 달라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엘리트스포츠에서 한국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기미를 보였던 일본은 한국 IOC 위원이 김운용 위원에 이어 이 회장 등 2명으로 늘어나자 스포츠 외교에서도 영향력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던 것이다. 삼성은 이미 미국 모토로라를 제치고 전자회사로 올림픽 파트너십에 참가했던 터였다.

이 회장은 여고생으로 국내 프로대회를 석권하던 박세리의 장래성을 눈여겨보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정복할 재목으로 키우기로 판단해 그룹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12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김연아와 이상화 등 빙상 선수들을 본격적으로 뒷바라지하기 위해 사위 김재열씨를 빙상 연맹 회장을 맡도록 하기도 했다.

이 회장의 집념으로 현재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마트폰과 가전·반도체 생산자로 변모했다. 한국스포츠도 1970년대 일본 비디오 제품을 들여와 영상을 보여주던 그의 젊은 적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제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 회장이 일본에서 배운 교육과 경험을 통해 한국스포츠는 진짜 극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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