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종전선언 흘러가는 얘기 아니길 바란다
[정치평론] 종전선언 흘러가는 얘기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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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병 정치평론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3일 제75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화상으로 연결된 이날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의 시작은 곧 ‘한반도 종전선언’이라고 말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갑자기 한반도 종전선언을 언급한 것을 놓고, 물밑에서 뭔가 흐름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은 논외로 하더라도 북핵협상 및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이른 현 상황에서, 그것도 미국 대선을 한 달쯤 앞둔 시점에서 불거진 한반도 종전선언 문제이기에 당연히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다.

종전선언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으로 발표한 선언문, 즉 ‘판문점 선언’에서도 합의된 내용이다. 당시 합의문에 따르면 남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2018년까지 종전을 선언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종전선언 이후에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다자회담을 추진하는 문제까지 합의를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별로 진척된 내용은 없다. 사실 당시의 합의대로만 됐다면 북미 북핵협상도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연히 남북관계도 지금처럼 냉랭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전선언이 비록 ‘정치적 선언’이긴 하지만, 그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은 지금의 정전협정체제를 끝내는 정치적 선언의 의미가 크다. 전쟁이 끝난 지 거의 70년이 됐지만 국제법적으로는 아직도 ‘전쟁을 잠시 중단한 상태’라는 것은 우리에겐 너무 가혹하다.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북한의 핵문제를 비롯해 남북관계, 북미관계 등 모든 것이 뒤틀리고 있는 것이다. 남북이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배치해 놓고 있으며, 수시로 벌어지는 군사훈련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하는 엄청난 국방비는 남북 모두에게 치명적인 부담을 안기고 있다. 그래서 전쟁을 중단한 상태를 아예 전쟁을 끝낸 상태, 즉 종전(終戰)이 된 상태임을 선언하자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국제적으로도 냉전체제의 마지막 철조망을 걷어 낸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종전선언으로 전쟁이 끝났다면 현 정전협정체제는 빠르게 변할 수밖에 없다. 유엔군의 지위와 역할부터 비무장 지대의 군사력 대치도 지금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평화체제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이며, 이는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것이다. 평양에 한국 대사관이나 미국 대사관이 들어설 공간도 열리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실질적인 한반도 평화로 가는 관문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항구적 평화체제로 가는 ‘문’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라 하겠다.

그러나 미국의 셈법은 조금 다를 수 있다. 아시아와 한국에서의 미국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걱정할 것이며, 매년 엄청난 무기를 팔고 있는 상황에서 이마저도 쉽지 않다고 볼 것이다. 더욱이 평화체제로 인해 한국의 위상이 강화될 경우 중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새로운 변수를 만들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불안정한 정전협정체제를 계속 끌고 가면서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고 동시에 무기도 더 많이 팔 수 있는 현 상태가 더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한반도 종전선언을 약속한 ‘판문점 선언’ 이후 한 달 보름 만에 열렸던 2018년 6월의 제2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북핵 협상의 결과도 큰 관심을 모았지만 동시에 북미 간에 종전선언이 발표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더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듯이 이렇다 할 성과 하나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트럼프 미 대통령의 태도는 우리에게도 충격이었다. 협상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언행도 답답했지만, 마치 작심한 듯 판을 깨버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기술은 생생한 충격이었다. 앞으로 북한 핵 문제는커녕 한반도 종전선언도 쉽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연일 방위비 인상과 무기 판매를 앞세우며 끊임없이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냉랭하던 북한 문제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종전선언 얘기를 꺼냈다. 한미 간에 내밀한 대화가 있다면 좋으련만 미국이 쉬 응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혹자는 말한다. 종전선언,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할 텐데 그것이 왜 중요하냐고 말이다. 무지한 얘기다. 종전선언은 그 뒤를 이을 평화체제를 열어가는 관문이다. 따라서 미국과의 불리한 협상을 감수하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구체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가장 결정적인 고비를 넘는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트럼프가 어려움에 처한 지금이 어쩌면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다.

마침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다음 달 초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다. 미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방문하는 것이다. 성급한 전문가들은 다시 ‘옥토버 서프라이즈’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 보인다. 폼페이오도 그 간의 언행을 보면 쉬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미중 관계에서 또 한국을 압박하려는 행보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폼페이오의 요구를 경청한 뒤 이를 북미 간 종전선언으로 연결할 수 있는 명분을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 입장에서도 큰 돈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마냥 반대만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에게도 좋은 소식이다. 이번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발언이 그냥 흘러가는 얘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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