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6.25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를 평가한다 <2>
[6.25전쟁 이야기] 6.25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를 평가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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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을 공모했던 (왼쪽부터)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 ⓒ천지일보 2020.7.24
6.25전쟁을 공모했던 (왼쪽부터)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 ⓒ천지일보 2020.7.24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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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개전 초 전쟁지도 72시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로 3년차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당해 대한민국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여부를 놓고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몰렸다. 6.25전쟁은 그의 재임기간에 발생해 정전으로 마감됐기에 전쟁지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시업적에 대해 평가는 관심이 없거나 무시됐고, 그의 과오만을 부각(浮刻)했다. 소위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개전 초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몰래 피난을 간 비겁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 폭파해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고생을 시킨 무책임한 대통령으로 매도(罵倒)되는 점은 진실을 비켜간 과도한 평가절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승만의 3일, 72시간의 행적을 전쟁지도 차원에서 추적·고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개전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한 상황을 최초 경찰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09시 30분경 창덕궁 비원에서 산책 중 10시경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 남침’상황을 보고받자 바로 경무대로 돌아왔다. 그 당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도 의정부 전선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10시에 북한의 기습도발이 ‘전면공격’임을 판단했다고 한다. 이어서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남침 상황을 보고한 시간은 공식적으로 10시 30분으로 확인된다. 보고내용에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춘천근교에 접근한다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불안해했다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22쪽에 증언돼있다. 당시 신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니 참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경찰의 정보는 신 장관의 보고와 달리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고 정확히 보고됐고, 이 대통령은 전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전면전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보고를 받은 후 국무회의(國務會議)의 소집을 지시했다. 11시에 개최된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주관했으나 특별한 대책 없이 12시에 산회했고, 오후 2시에 다시 대통령 주재 하에 국무회의가 개최됐다. 그 직전에 오전 11시 35분부터 13시까지 무쵸 주한 미 대사를 경무대로 불러서 미 측이 파악한 전황을 보고받고 논의했다. 또한 무쵸 대사와 회담을 마친 후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연결시켜서 장면(張勉) 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정일권 장군과 손원일 제독을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중용해 전쟁지휘를 맡기고자하는 구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대로 장면대사는 25일 01시(워싱턴시간)에 미 국무부를 방문해 한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해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요구 했다”고 알림으로써 미군의 개입이 예상되는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하와이 호놀룰루 총영사 김용식에게 미 본토에서 군함(patrol craft)을 구입해 귀국중인 손원일 해군총장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최단시간 내 귀국하라고 지시를 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 대통령(76). (제공: 장순휘박사) ⓒ천지일보 2020.7.24
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 대통령(76). (제공: 장순휘박사) ⓒ천지일보 2020.7.24

6월 25일 10시에 북한남침의 전쟁 상황을 보고받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가 전쟁이 돌입했다는 위기상황을 인식했고,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결심하는 ‘전쟁지도’의 구상을 본능적으로 나타냈다. 이어서 11시 35분 무쵸 미 대사를 만났을 때부터 이 대통령의 전쟁지도가 시작됐다. 즉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통보했던 것이다. 개전 초 72시간동안 이승만대통령의 전쟁지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에 대해 한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이에 무쵸 미 대사는 15시에 국무장관에게 전문보고를 했으며, 이 전문보고는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을 위한 특정탄약 10일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라(to ship ten days supply of certain items of ammunition at once Pusan for Korean Army)”라는 지시로 실행됐다. 이 요청은 국군의 취약점을 대통령이 평소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서울에 계엄령(martial law) 선포를 고민했고, 당시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육군 지휘부에 부담을 주는 계엄령 선포를 자제했던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초기 이 대통령의 과오로 부각되는 것은 대국민 홍보인데 25일 07시에 국방부에서 중앙방송(KBS)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했고, 12시에 국방부 담화를 발표했다. 그 와중에 ‘국군 제17연대 해주 돌입’과 ‘국군 의정부 탈환 북진 중’이라는 오보(誤報)로 인해 국민들이 심각한 혼란을 겪게 만든 것이었다. 이 실책은 이 대통령의 책임보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책임과 무능함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셋째, 이승만 대통령은 총력전을 이미 구상하고 전쟁에 임했다. 그런 대통령의 전쟁지도는 군과 경찰,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이 총동원된 전쟁으로 패망을 막았던 것이다.

넷째,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를 구상했다. 즉 이 대통령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38도선이 무너진 점을 이용해 미국의 힘을 빌려 북진통일을 해야겠다는 전쟁지도의 궁극적 목표를 구상한 것이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무쵸 대사를 통해 미 극동사령부(FECOM)에서 F-51전투기를 요청해 공군력을 보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맥아더 장군은 즉각 지원을 지시해 26일 무스탕(F-51) 전투기 10대의 인도를 발표해 한국공군이 역사상 첫 전투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여섯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대포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 책임론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26일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에서 이 대통령은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중략) 어서 한국을 구해주시오”라고 무섭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당시 미국에서 맥아더 소령과 친분관계가 있는 사이로 두 사람의 오랜 교분이 맥아더 장군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지원의 배경도 됐다고 한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국가의 위기에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전쟁지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26일 04시 30분 무쵸 미 대사에게도 다시 전화를 걸어서 대포와 전투기를 추가 요청했다.

일곱째, 이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사경력자 회의’를 26일 10시 소집해 자문을 구했다. 군사경력자 회의에서는 전황을 보고받고 토의를 주관했으나 ‘서울사수’와 ‘한강방어선전투’가 맞서서 신 장관과 채 총장의 주장대로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폐회했으나 이 결정은 국군에게 치명적인 전투력 와해가 되는 과오가 됐다. 서울 사수론으로 후방에 있었던 육군 제2·3·5사단이 강북으로 투입됐다가 28일 02시 40분 한강대교가 조기 폭파되면서 퇴로가 막혀 중장비를 버리고 지리멸렬 철수하는 국군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서울사수 실패는 국방부를 신뢰했던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라고 보는 것은 과장된 점이 있다.

여덟째, 제6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서 정치지도력을 발휘했다. 26일 11시에 국회본회의에 참석해 초당적인 협조를 구하고, 유엔총회에 ‘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국회의 의결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본회의에서는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홉째, 미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설득한 구국의 군사외교를 통해 긴급 군사원조와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다. 27일 01시에 장면 주미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트루먼 대통령을 직접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면 대사는 26일 15시(워싱턴 시각)에 트루먼을 회동해 이 대통령의 요청을 전달했고, 트루먼 대통령의 공식적인 한국 지원을 확인했다. 이러한 외교적인 대상과 시기를 놓치지 않고 판단할 수 있었던 이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적 감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국의 외교활동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 평가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직후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국군통수권자로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침식을 거르면서 전쟁을 지도했던 전쟁지도는 매우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군사외교를 통해 미국의 정치지도자 트루먼 대통령과 군사지도자 맥아더 장군을 설득해 미국의 군사지원과 조기 참전을 이끌어 낸 것은 외교의 신(神)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만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에는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개전 초 3일간 전쟁지도의 업적에서 탁월했다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군사지원을 극비리에 추진해 전쟁을 준비한 군사외교적 행위와 체제내부의 전시 전환과 군부대 추가 창설 및 각 제대별 공격준비훈련 등 치밀한 전쟁지도는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전쟁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은 전쟁초기 전투력의 우세가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지속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판단의 착오를 범했으며, 철수한 미군의 조기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그리고 한국군을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무시한 점도 오류를 저지른 것이고, 특히 춘천방면의 북한군 제2군단과 국군 제6사단의 용전분투로 돈좌된 상황을 보고받고 속전속결을 구상했던 제1단계 전쟁지도에 차질을 빚었다. 따라서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전쟁준비단계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개전과 동시에 국군의 강력한 저항과 미군의 조기 개입으로 실패하기 시작해, 이후 전쟁기간 중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된다.

<1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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