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역사] 세계문화기행 러시아편 (4)
[사진으로 보는 역사] 세계문화기행 러시아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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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은영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과 외교관 일행 1896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7.22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과 외교관 일행 1896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7.22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과 외교관 일행 1896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른 민영환은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이자면서도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대한제국의 특명 전권공사로 1896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진은 민영환(앞줄 가운데)과 그 일행이 러시아 관리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함께했던 일행으로 학부 대신 윤치호, 중국어 통역관 김득련이 있으며, 그 외에 수행원과 주한 러시아 공사관 측의 안내인까지 여섯 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특사였다. 이들은 대관식 후 크렘린 궁에서 황제와 황후를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 뵘)했다.

한편 1905년 11월 30일 새벽,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나라 잃은 슬픔에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의 나이 만 44세였다. 민영환의 유족들은 그의 피 묻은 옷과 칼을 뒷방에 봉안했는데 7개월이 지나 방문을 열어보니 마룻바닥 틈 사이로 푸른 대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이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해 ‘혈죽’이라 명명됐다.

아래는 민영환의 유서 전문이다.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나나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배 더욱 분발하고 기운을 내어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며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두운 저승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아관파천(고종이 피신하던 길) 1896년 2월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7.22
아관파천(고종이 피신하던 길) 1896년 2월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0.7.22

아관파천(고종이 피신하던 길) 1896년 2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1896년 2월 11일 일제의 눈을 피해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다. 사진 속에 보이는 길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길, 일명 ‘아관파천’ 길목이다. 고작 100여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긴박했으며, 우리 민족에게는 굴욕적인 길이었다. 1897년 2월 20일까지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열어 조선은 독립제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사진을 보면 회칠한 돌담 끝 쪽으로 권위의 상징이었던 솟을대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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