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in] 인종차별 반대시위서 콜럼버스 동상은 왜 목이 잘렸을까?
[이슈in] 인종차별 반대시위서 콜럼버스 동상은 왜 목이 잘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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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AP/뉴시스]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10일(현지시간) 보스턴에 있는 미 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각상의 머리가 잘려나가 있다. 보스턴 시장은 이날 콜럼버스 조각상이 훼손됐다고 밝혔다. 2020.06.11
[보스턴=AP/뉴시스]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10일(현지시간) 보스턴에 있는 미 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각상의 머리가 잘려나가 있다. 보스턴 시장은 이날 콜럼버스 조각상이 훼손됐다고 밝혔다. 2020.06.11

 

인디언 인권 옹호 시위대의 분노

신대륙 발견 업적 뒤집은 만행들

 

당시 성직자 “처음 본 잔인한 학살”

“산 채로 화형에 부녀자 능욕‧살인”

 

인디언 인권 짓밟은 역대 대통령
‘자유‧평등’ 미국 건국이념에 배치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면서 촉발된 미국의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인디언 인종차별 항의로 번졌다.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도심 공원에서는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디언 원주민 인권을 옹호하는 1천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열었다. 시위대는 ‘이 땅은 원주민의 땅’ ‘콜럼버스는 집단학살자’라는 손팻말을 들었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도 콜럼버스 동상이 훼손됐다.

콜럼버스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엔 어떤 악연이 있는 것일까.

◆ 콜럼버스의 대륙 발견… 인디언 학살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의 탐험가로 4번에 걸친 항해(1492~93, 1493~96, 1498~1500, 1502~04)를 통해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탐험하고 개발 및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세척의 조그만 배(가장 큰 배: 길이 29m, 폭 8.5m, 돛대 3개)와 90명이라는 빈약한 인원으로 출발해 아메리카 대륙을 찾았다.

그의 업적은 대단했지만 현재는 콜럼버스는 흑인노예제의 시초, 아메리카의 원주민 학살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최초 흑인 노예도 콜럼버스의 항해에 참가했던 이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 시대의 산물인 흑인 노예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항로를 통해 강제로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거 이주해야 했다. 흑인 노예가 억지로 끌려와 착취를 당했다면, 원주민인 인디언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특히 그가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이정덕 교수는 그의 칼럼 ‘인디언 학살과 착취’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칼럼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저항하는 인디언을 잔인하게 다루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바치도록 했다. 아무리 찾아도 황금이 나오지 않자 인디언들에게 3달에 일정한 양의 금을 찾아서 바치도록 했다. 바치는 사람에게는 목에 구리줄을 차도록 해 이를 매지 않은 사람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까사스 신부는 1513년 스페인군의 쿠바점령에 종군하며 “이제껏 보지 못한 가장 잔인한 학살이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서인도제도의 역사’라는 책에서는 “스페인인들은 사람을 두동강 낼 수 있느냐? 목을 자를 수 있느냐? 창자를 끄집어 낼 수 있느냐? 내기를 걸기도 했다”며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애기를 발로 차고 찢어발기고 머리를 바위에 쳐 박았다. 부녀자를 능욕하고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장작불 속에 던져 넣어서 살아 있는 인디언을 태워 죽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는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두 눈으로 그 증거를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인디언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 같은 동물이었을 뿐”이라며 “초기에 건너와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사람들은 이러한 학살과 약탈을 일삼으며 대영주, 소영주, 부호가 됐다”고 설명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영국 박해 피해 아메리카 개척한 청교도

인디언 학살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다는 점도 눈에 띄는 점이다. 영국을 청교도 국가로 만들려다 실패한 청교도인들은 16세기 당시 처형을 당하는 등 보복 위기에 놓였고,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오늘날 미국의 기초가 됐다. 1620년 9월 ‘필그림(청교도 순례자)’들이 낡은 배 메이플라워를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언의 도움으로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식량과 사냥감을 얻기 위해 인디언 마을을 약탈했고, 심지어는 무력을 이용해 거래(혹은 조약)에 도움이 되는 부족 지도층을 교묘히 빼돌려 강제조약을 공표한 뒤 살해하거나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해 저항하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너새니얼 필브릭 저서 ‘메이플라워’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위기일발의 상황이긴 했으나 먼저 살인과 학살을 감행한 것은 필그림들이었다! 메사추세츠 족 인디언들은 필그림을 ‘와타퀴네지’라고 불렀다. 살인자라는 뜻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당시 네덜란드 라이덴에 남아 있던 존 로빈슨 목사가 인디억 학살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 내용도 인용했다. 당시 로빈슨 목사는 수신자 브래드퍼드에게 “오, 그토록 잔인하게 모두 죽여 버리다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일단 붉은 피가 넘쳐흐르기 시작하면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 법이오. 그들이 당해도 싸다고? 그렇다 해도 그 유혈 사태를 굳이 그리스도교인이 도발해야만 했소?”라고 반문했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에 반기를 든다. 이들은 1975년부터 반(反)추수감사절 행사를 열며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지난 2005년 11월 24일 북아메리카 원주민 3000명은 인디언 권리운동의 성지(聖地)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섬을 찾아 추수감사절이 아닌 추수강탈절이라고 분노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사회학과 댄 브룩 교수도 미국인들의 추수감사절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는 “추수감사절을 자기성찰적 집단 단식을 하는 국가적 속죄일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자신들이 받았던 서러움을 망각하고 신대륙에서 다른 사람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사냥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했다. 일테면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에서는 ‘첫 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는 등의 무자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청교도들의 이러한 행동은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자행했던 ‘마녀사냥’과 맥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청교도 역시 칼빈의 영향을 받아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인디언을 학살한 것이라며 불편하게 보는 시각도 이에 근거한다.

인디언 학살의 장본인이었던 이 청교도들이 바로 한반도에 장로교를 안착시킨 미국 북장로교의 시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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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 학살과 기독교‧미국

미국은 주로 청교도인을 중심한 영국인들이 주로 차지했다. 1630년부터 매년 약 1000명의 영국인이 미국 보스톤 부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죽였다. 이어지는 영국이나 미국의 정책은 죽은 인디언이 더 좋다는 것이었다. 이후 인종청소가 진행됐다.

미국 역대 대통령의 발언에도 이 같은 방향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초대 대통령이 될 워싱톤은 1783년 “우리 정착지가 점점 넓어지면 앞으로는 분명 야만인, 즉 늑대 같은 인디언들의 후퇴가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발언했다. 3대 대통령 제퍼슨은 “(인디언들은) 앞으로 전쟁을 통해 숫자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5대 대통령 먼로는 “인디언들이 서부로 이주하는 것이 곧 수혜를 입는 것”이라며 인디언의 강제 이주를 당연시했다.

잭슨 대통령은 1830년부터 면화 재배지를 확대하기 위해 남부의 여러 원주민들을 1300㎞가 넘는 오클라호마 등의 중부 황무지로 쫓아냈다. 겨울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한 상태로 이동하느라 가면서 3분의 1이 죽었다.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는 미국동부에서의 인디언 저항에 대해 “미친 짓”이라며 “(식민지)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집단은 가차 없이 조기에 멸종되고 만다”고 발언하며 당시 분위기를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백인 농부들은 토지를 빼앗기 위해 인디언들을 죽이고 쫓아냈다. 중부 캘리포니아에 살던 유키 인디언의 수는 1859년 5000명에서 1864년 300명으로 줄었다. 무기나 지속적인 전쟁체계를 갖추지 못한 인디언들은 게릴라식으로 각지에서 백인들을 공격하였지만 백인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인디언의 사망자의 75~90%는 직접적인 살인보다는 천연두, 발진티푸스, 홍역 등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병원균들은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콜로라도대학 아메리칸인디언학과 전 교수인 워드 처칠은 서구인들이 인디언을 죽이기 위해 직접 세균을 퍼트리기도 한 것으로 봤다. 그 증거로 그는 1763년 펜실베니아에서 영국군사령관인 애머스트 경이 델레웨어 인디언과 싸우고 있는 부케대령에게 보낸 편지글을 보였다. 그는 “천연두균을 묻혀 모포를 배포하거나 다른 모든 수단을 써서 이 저주받을 인종을 절멸시키는 것이 좋겠다”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 실제 천연두가 퍼졌다. 1837년에도 다코타의 미군 장교들이 천연두균이 묻은 모포를 인디언에게 일부러 줬고 그 후 천연두가 퍼져 10만명 이상 죽었다는 주장이다.

◆ “미국, 인종주의의 발상지”

뿌리 깊은 아메리카 내 인종주의는 사실 유럽 등 서구의 세력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경북대 철학과 허재훈 교수는 지난해 2월 그의 연구보고서 ‘계몽주의와 인종주의’에서 유럽을 위시한 서양 문명에 대해 “인종주의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세의 기독교가 이교도에게 저지른 차별과 박해는 문화적 인종주의를 넘어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근대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절멸과 아프리카인의 노예화를 통해 유럽 백인에게 내면화돼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19세기 미국에서 인종주의가 정교하게 전개됐다고 봤는데 “미국은 인디언을 학살한 집단살해의 살육장이자 흑인 차별을 제도화한 인종주의의 발상지였다”며 “미국의 가장 위험한 급소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제다. 제도화된 인종주의의 문제는 미국에서 1776년 독립선언의 초안을 잡을 때부터 심각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초안에서는 미국의 건국이념이 자유와 평등이었음에도 인종의 위계화를 시도했다. 독립선언의 기초를 제시한 제퍼슨조차 흑인이 더위에 강하다는 이유로 육체노동에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같이 미국의 건국 이전과 이후로 뿌리 깊게 자리했던 인종주의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인한 규제와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화법, 흑인 플로이드의 사망 등과 맞물린 ‘인종주의’에 대한 해법과 관련해 국제사회의 대응에 이목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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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섭 2020-06-13 10:57:17
짐승들이냐? 피부 색깔로 편가르게? 등신ㅅㄲ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