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야기]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는 국군의 처절한 지연전이었다
[6.25전쟁 이야기]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는 국군의 처절한 지연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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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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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2> 

선전포고 없는 기습(surprise attack)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8도선에서의 초기 전투를 고찰해 봐야한다. 6월 25일부터 30일까지의 전투를 통상 ‘38도선 전선의 초기 전투’라고 구분한다. 이 초기전투를 서부지역 옹진반도와 개성·문산지역전투, 중서부지역인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전투,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전투 그리고 동부지역인 동해안(양양)지역전투로 5개 지역전투로 구분한다. 따라서 개전초기 기습을 당한 국군은 전 전선에서 결사적인 방어전투를 전개해 지연전을 했다.

북한군은 제1단계 작전목표인 ‘서울 점령과 국군 주력의 격멸’을 달성하기 위해 제1군단과 제2군단이 협조된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의 경기도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공격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으로 이어지는 축선에 공격을 집중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양양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따라서 6.25전쟁의 38도선 전선 상의 초기전투는 옹진반도, 개성-문산지역전투,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전투, 춘천-홍천지역전투, 동해안지역전투를 중심으로 5개 축선에서 동시다발 기습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우선 북한군은 선전포고가 없이 ‘폭풍’이라는 암호명으로 기습을 했고,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8.15광복절 전까지 남한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은 허구이고, 사전에 계획된 기습공격이었으며, 서부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38도선 전 전전에서 공격한 전면전(total war)이었다. 북한군은 남침작전 계획에 참여한 당과 군부의 고위급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군관과 인민군 전사들은 통상적인 부대이동과 훈련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로 극비리에 전쟁이 준비됐던 것이다.

반면에 국군은 초기 38도선 방어에 실패한 원인이 북한군의 동향파악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군의 적정 파악과 대처에 혼선과 태만이 혼재된 안일한 대비태세가 문제가 됐고, 장병의 훈련미흡, 경계소홀, 부적절한 인사이동명령 등 군의 총체적인 대비 실패였다. 특히 비상경계령을 유지해오다가 북한군의 남침개시 이틀 전 6월 23일 자정부터 45일간 지속해오던 ‘경계강화령’을 해제했다. 해제한 다음 날이 24일 토요일이었고, 전군에서 사병들이 농번기 휴가에다가 외출, 외박으로 병력의 3분의 1이 병영을 비운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25일 새벽 04시에 남침(南侵)을 맞은 것이다.

초기전투에서 기습을 당한 국군은 병력수와 무기장비면에서 절대 열세였었고, T-34 전차 150대와 장갑차 54대를 앞세우고 우세한 포병화력으로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에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결국은 3일 만에 서울까지 뚫리게 된 이유는 북한군의 T-34전차의 위력 때문이라고 해도 된다.

6.25전쟁 발발을 보도한 내외신 언론.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6.25전쟁 발발을 보도한 내외신 언론.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옹진반도 지역전투

황해도 옹진반도는 인천에서 90㎞ 거리에 있고, 동·서·남 3면이 모두 바다에 접해있는 반도지역이다. 38도선이 지나는 전투정면이 45㎞라는 광정면은 육본직할 1개 연대(독립 제17연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제17연대는 2개 대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옹진부근에 배치해 후방으로 바다에 연하는 7~8㎞의 종심을 가진 배수지진(背水之陣)의 전투지대를 방어하고 있었다. 6월 25일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와 제3경비여단의 기습을 받고 주저항선이 오후 1시경 동서로 양분되자 지연전을 전개했지만 결국 26일 오전 해군 제1정대와 민간선박편으로 강요된 철수를 했다.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국군 제17연대는 27~28일 사이에 인천을 경유, 수원으로 집결해 육군본부의 예비부대가 됐다.

암호명 ‘폭풍’ 북한군 기습 공격

5개 축선서 동시다발적 공격

8.15 전에 남한 무력 점령 목표

초기 기습에 국군 결사적 방어전

 

국군, 北 동향파악 실패가 결정적

남침 2일 전 경계강화령 해제

휴가·외출·외박에 병력 1/3 부재

T-34전차에 3일 만에 서울 뺏겨

북한군 전면남침도 및 국군 방어배치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북한군 전면남침도 및 국군 방어배치도.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개성-문산 지역전투

개성에서 문산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접근로에는 국군 제1사단이 청단에서부터 고랑포까지 약94㎞의 광정면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1사단은 제12연대와 제13연대가 전방에 배치됐고, 예비인 제11연대가 수색에서 교육훈련 중이었다. 6월 25일 개전 당일 개성-문산지역으로는 북한군 제203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공격해 왔다.

국군 제1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에 전방 2개 연대가 각개 격파됐고, 패퇴하는 부대를 수습해 임진강 남쪽 주저항선에 배치하는 한편, 예비연대인 제11연대를 수색에서 급히 문산지구로 진출시켜 임진교를 중심으로 문산 지역 일대에 종심으로 배치해 방어를 했다.

북한군은 6월 26일 임진강 철교를 통해 5대의 전차를 선두로 보·전·포 협동공격으로 제13연대 동측방으로 우회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제11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가 불가피했으나 반격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사단 주력부대는 금곡리 방면으로 진출했다. 27일 아침까지 봉일천 북쪽 위전리-도내리를 연하는 최후저항선으로 재배치했다. 국군 제1사단은 봉일천 일대에서 북한군의 서울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28일 오전까지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진지를 사수하고자 싸웠으나 패배가 불가피했다.

당시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본부중대 소속 박래봉 상병(예비역 대위전역)의 “6.25전쟁 참전일지”를 통해 실제 상황을 확인해보니 “새벽4시경, 비상나팔 소리가 울리며 북괴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남진 중이라고 전달됐다.

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명령이라고 완전무장을 하고 사단 연병장에 집합명령이 내려 배낭과 보자기에 서류를 쌓아 짊어지고 일보계 담당자와 본부중대에 비치된 M 기관포 총열과 몸통을 각자 어깨에 메고 연병장에 나가보니 연대병력이 집합이 돼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비가 오는 그 시간에 우비를 입고 단상에 올라서서 “북한 인민군이 개성을 점령하고 전차부대를 동반해 임진강을 도하했고 서울을 향해 남진 중”이라고 전황을 병사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수색역에서 화물차를 타고 문산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려줬다는 기록에서 긴박한 당시 전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새벽 04시에 전방의 전투상황이 실시간으로 후방부대에 비상상황전파가 됐다는 것은 국군의 초기 통신망 상태가 비교적 잘 유지됐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북한군이 T-34전차를 앞세워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북한군이 T-34전차를 앞세워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다.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5.21

동두천-포천-의정부 지역전투

국군 제7사단 정면에는 북한군의 주공부대인 제3사단이 운천에서 포천방면으로, 제4사단이 연천에서 동두천방면으로 각각 제109·107전차연대와 협동해 남진을 했다. 서부전선을 책임진 북한군 제1군단의 작전목표는 서울을 조기에 점령하는 것으로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1개 전차대대를, 포천축선에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각각 투입하고, 제13·15사단을 제2제대로 운용했다. 이 서부전선에서 북한군 공격부대의 전투력은 국군(4500명)보다 병력면에서 7배(3만 2,000명), 화력면에서 18배나 우세하게 투입된 국면이었으니 방어라는 것은 불가한 것이었다.

북한군의 공격개시를 알고 국군 제7사단은 전방에 배치된 경계부대로 북한군의 선두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면서 의정부에서 교육훈련 중이던 제1연대와 제9연대를 북한군의 접근로 상 주진지인 감악산-마차산-소요산-가랑산-천주산을 연하는 주저항선에 배치하기 위해 철수했다. 동두천 북방 제1연대 정면의 북한군 제4사단은 전곡-초성리-동두천 축선에 전차2개 대대로 증강된 제16연대를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봉암리 축선에 제18연대를 조공으로 투입해 병진공격을 했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집중공격은 전곡에서 한탄강을 돌파해 초성리를 거쳐 동두천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시간이 25일 오전 상황이었다. 국군 제1연대는 정오 무렵에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6연대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오후 3시경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으로 소요산 일대로 철수했다. 결국은 해질 무렵에는 북한군이 동두천 시내를 진입했고 국군 제1연대는 밤10시경 덕정지역으로 철수했다.

포천지역에서는 국군 제7사단 지9연대가 방어를 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에 배속된 기계화부대가 신속하게 공격해 25일 오전11시경 포천을 진입했고, 전차의 엄호 하에 오후2시경 천주산과 가랑산을 연하는 아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해 오후4시경 포천 읍내까지 점령했다. 국군 제9연대는 주저항선이 조기 붕괴되자 야간을 이용해 광릉지역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3사단이 25일 오전 중 포천을 점령하고, 병진 공격하는 제4사단이 동두천을 점령해 의정부지역으로 협공할 수 있는 공격기세를 유지했다.

국군 제7사단은 26일 아침 제1연대와 증원된 제18연대를 역습에 투입해 동두천을 탈환했다. 그러나 국군 제2사단의 포천 반격이 실패하고, 북한군 제3사단에 의해 의정부가 점령당하자 아군은 동두천과 의정부 사이에서 혼란과 동시에 퇴로가 차단되는 위기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국군 제1연대는 창동지역으로, 제18연대는 고양을 경유해 28일 김포반도지역으로 분산 철수했다. 패전이었다.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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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2020-05-22 14:44:18
지나간 역사이기에 이렇게 글로 읽어 내려가지만 당시 전쟁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느껴집니다. 순국 선혈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겠네요.